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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묵상(갈라디아서,에베소서)

2024년10월28일(월) (갈 5:1~12) 진리에 순종할 때 참자유를 누립니다

by 방일 2024.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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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5:1~12>  진리에 순종할 때 참자유를 누립니다

 

 

 

오늘의 찬송(새 93장 예수는 나의 힘이요)

 

 

 

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사랑

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7.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8.  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
9.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10.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11.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12.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말씀 묵상>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

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 것은 자유를 누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2.  나 바울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할례를 받는다면 그리스도는 여러분에게 아무 유익이 없을 것입니다.
3.  내가 할례를 받는 모든 사람에게 다시 증거합니다. 그런 사람은 율법 전체를 행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4.  율법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5.  그러나 우리는 성령을 통해 믿음으로 인해 의의 소망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를 받는 것이나 할례를 받지 않는 것이나 아무 소용이 없고 오직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뿐입니다.
7.  여러분은 잘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누가 여러분을 가로막고 진리에 순종치 못하게 했습니까?
8.  그러한 권면은 여러분을 부르신 분에게서 온 것이 아닙니다.
9.  적은 누룩이 반죽 전체를 부풀게 합니다.
10.  나는 여러분이 다른 아무 생각도 품지 않을 것을 확신합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여러분을 혼란에 빠뜨리는 사람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11.  형제들이여, 내가 여전히 할례를 전한다면 왜 아직도 핍박을 받겠습니까? 그랬다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없어졌을 것입니다.
12.  여러분을 선동하는 사람들은 차라리 스스로를 거세해 버렸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요약>

 

 

바울은 예수님이 자유를 주셨으니 다시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할례받고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는 자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집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가 아니라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만 효력 있습니다. 진리에 순종하지 못하게 하고 성도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심판받습니다.

 

 

 

성도의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지키내기 위하여

 

 

갈라디아서 5:1-12(그루터기 선교회)

 

자유! 하면 인상 깊게 떠오르는 두 영화가 있다.

멜 깁슨이 감독이자 주연으로 출연한 브레이브 하트와

스트브 매퀸이 주연 빠삐용(Papillon)으로 출연한 영화이다.

 

13세기 영국 왕 에드워드 1세에 대항하여 독립운동을 주도한

스코트랜드의 지도자 윌리암 엘리스는 동족의 배신으로 잡혀

마지막 처형장에서 무서운 고문으로 죽어가면서

자비를 구걸하면 쉽게 죽도록 해주겠다는

사형 집행관의 설들을 거절하고 마지막 던지는 말로

Freedom!(자유!)을 외치면서 칼날에 목이 잘리게 된다.

 

단발마처럼 외친 이 “자유”의 외침은 그 사형장에 와 있던

배신자 스코트랜드의 귀족의 마음과 양심에 메아리 쳐

그는 영국 왕의 충성 맹세를 배신하고

스코트랜드의 자유를 가져오는 일에 자신을 헌신하게 된다.

 

한편 영화 <빠삐용>은 남미 프랑스령의 악명 높은 기아나 형무소에서

탈출을 꾀하는 종신수 앙리 샤리엘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그의 가슴에는 나비(빠삐용) 문신이 있어서 별명이 빠삐용이라 불린다.

 

그는 잦은 탈출 시도 때문에 마침내 다 이상 도망가지 못하도록

바다에 상어가 우글거리는 악마의 섬으로 보내진다.

그러나 그는 이미 노령에 이르렀는데도 날마다 바닷가에 않아

물의 흐름을 관찰하고 연구하여 마침내 탈출을 시도하게 된다.

 

그가 악마의 섬을 빠져나가기 위해 코코낫 열매를 모아 뗏목을 만들고

자기를 싣고 갈 뗏목과 함께 바다를 향해 몸을 던지면서

그가 마지막으로 외친 소리 역시 “Freedom!"(자유) 였다.

 

나는 오랫동안 나의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이런 영화들을 보면서

인간의 보편적 가치로써 이 “자유”의 소중함을 일깨우게 되는데

그래서 그런지 오늘의 말씀 첫 구절이 강조하는 “자유”에의 선언이

그냥 가볍게 지나쳐지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5:1]

 

위의 두 영화에서 추구하는 국가적 혹은 개인적인 자유보다

더 소중한 자유가 있다면 그것은 인간 영혼의 자유 인데

이것은 죄와 율법을 교묘히 사용하여

인간의 영혼을 옥죄는 마귀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우리 주님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 희생과

죽음을 통과하시고 살아 나오셔서

믿음으로 그와 연합된 자들에게 주시는 자유이다.

 

그런데 이 자유는 너무나 소중한 것이어서

생명보다 귀한 이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하려고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에게 접근한 뱀 같은 존재들이 있다.

 

갈라디아 교회에는 교묘히 침투한 거짓 교사들이 있었고

오늘날도 연약한 인간의 심리에 죄와 율법

혹은 율법적 심리를 이용해 접근하는 세력들이 있다.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로

자유를 얻게 했던 사도 바울은

지금 거짓 교리로 자유를 침탈당한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굳건하게 서서 “다시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호소한다.

 

한 국가가 억압하는 국가로부터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서

치루는 희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엄청난 희생을 딛고 얻은 이 자유를 지켜 내는 것인데

여기에는 자유를 지키려는 의지력과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 할만한 힘이 있어야 한다.

 

말로 다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희생 위에 세워진 교회에

성도의 자유를 엿보는 은밀한 마수의 손길이

갈라디아 교회에 뻗쳤던 것처럼

오늘 우리들의 교회와 성도들의 양심을 위협하는 세력들이 있다.

 

우리들의 교회에서 건강한 신학의 역할은

이 은밀한 세력들을 파수하고 방어하는 역할을 하며

(왜 한 교회의 목사가 무슨 신학을 공부했는지가 중요한 이유이다)

성도 개인의 건강한 신앙은 강한 면역력으로

이런 병적 신앙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할 수 있다.

 

오늘 날 서구 교회들을 무너지게 만든 세력이 자유주의 신학이라면

한국교회의 위협 세력은 율법주의와 신비주의 신앙이라고 생각된다.

 

율법주의 신앙은 은혜로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에 감흥하여

감사와 믿음으로 받아 드리기보다

어떤 선동자들의 유혹처럼 병적 자존심이 발동하여

갈라디아 교인들이 할례나 해와 날과 절기를 지키는 것으로

자기의 공로(행위)를 덧붙이기 하고 싶어 한 것처럼

 

하나님 은혜와 사랑을 얻어내기 위해 인정받을 만한

나의 공로를 덧붙이기 하려고 하니 이것은 다만 은혜로 구원받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헛되게 하며 욕되게 하는 것이요

계속해서 이 덧붙이기를 유지하기 위해 율법의 종이 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신비주의 신학과 신앙은

하나님의 사랑과 임재 체험을 위해

인간적인 방법으로 추구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최근 우리 한국교회에도 불건전한 신사도 운동 같은 것으로 나타나

성도들의 신앙을 혼란에 빠트리는 일들도 곳곳에 있었다.

 

그러나 그 어떤 것으로라도 성도들을 미혹하고 혼란케 하는 것들에 대해

바울은 오늘의 말씀 마지막 구절에서는 매우 극단적인 표현까지 썼는데

그것은 (할례 주장자들에 대해)

차라리 너희 자신을 베어버리기 원하다고까지 저주성 발언을 쏟고 있다.

 

여기서 너희 자신을 베어버리라고 하는 것은

할례의식에서 남자 생식기의 표피 일부분을 잘라내는 정도가 아니라

너희 자신의 거시기(생식기)를 예 거세하여 힘을 잃어버리고

멸망으로 들어가라고 하는 무서운 저주성 발언으로 이해되는데

순수 복음을 지켜내려는 바울 사도의 마음이 얼마나 통분했으면

이렇게까지 나가야 했는가 하는 그의 모습에서

순수 복음을 지켜내기 원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읽게 된다.

 

오늘의 묵상을 내리면서 복음의 순수를 지켜내려는 사도의 권고처럼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고 바른 신앙에 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얻게 해주신 자유의 가치를 인식하는 것과

이 자유를 지켜내기 위해 깨어 굳게 서는 신앙을 가지는 것

 

그리고 어떤 영적 위협 세력도 퇴치할 수 있도록

평소 영적 강건함을 유지해 나가는 정상적인 신앙생활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이아침 다시 한 번 마음 깊이 새긴다.

 

주님!

생명을 내어 주신 십자가 희생으로

입혀주신 이 소중한 복음과 자유를

그릇된 가르침으로부터 지켜내는

우리들의 교회와 나의 신앙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런 자는 율법 전체를 지켜야 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설명 : 그러나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령을 힘입어서

믿음으로 얻는 의의 소망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으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오직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너희가 달음질을 잘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

그런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나는 너희가 다른 아무 생각도 품지 않으리라는 것을 주님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다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차라리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율법이 아닌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활지침을 가르쳐 주고 있다.

예수님이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어 주셨으니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다.

바울 사도는 앞에서 율법의 종살이에 대해 설명하고 그리스도께서 그 율법의 행위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십자가를 통해 속량하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돌아가 할례를 받는 일은 보석금을 지불하고 감옥에서 나오게 해 주었음에도 당사자는 계속 감옥에 있으려고 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온전한 자유는 싸워서 얻는 것이 아니라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렇게 예수님께서 주신 자유를 지키고 누려야 한다.

바울은 거짓 교사들의 위협을 적은 누룩에 비유하며 경고하고 있다.

처음에는 미미하게 보이지만 결국에는 교회 공동체를 위협하는 존재들이 되고 만다.

예수님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셨는데 결국 거짓 가르침에 흔들리지 말것을 요청한다.

자기가 율법을 허용했더라면 전도하는 데 어려움도 없었을 텐데 반대했기 때문에 저들이 십자가의 거침돌이 되었다고 한다.

율법의 행위를 주장하는 것은 십자가의 은혜가 불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불신앙이 되어 예수님을 믿는 이들에게 부딪히는 돌과 걸려 넘어지는 바위가 되기 때문이다.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들의 신앙생활에 디딤돌 역할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침투한 율법주의 누룩을 용납할 수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적은 누룩이 큰 덩어리를 부풀게 하듯 적은 누룩, 죄와의 타협이 인생 전체를 파괴하고 순수한 복음 공동체를 무너뜨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약한 지체는 사랑으로 용납해야 되겠지만 죄의 오염은 단호하게 막아서 신앙의 순수성을 잘 지켜야 하리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9~10)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약 2:11)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9:18)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눅 11:42)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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