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와 숙녀 - 박인환(朴寅煥) (2024.10.5.)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 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 별이 떨어진다
상심(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볍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孤立)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燈臺)……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는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시작>5호, 1955년 10월
* 젊은 시절에 한참 시를 좋아하면서 이 시를 접하고서 깊은 감성에 휩싸이게 되고,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었던 기억이 새롭다.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젊은 시인은 삶의 애절함과 상실감으로 인하여 술과 삶의 애증과 함께 모두 던져버리고 떠난 목마를 탄 숙녀를 노래하고 있다.
자신의 순수한 인생과 사랑과 희망을 모두 내버리고 술과 떠나가는 소녀를 안타까워하며 삶의 허무와 애증을 가을바람과 함께 읊조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하나의 통속한 세상처럼 그려가면서도 떠나가는 안타까움을 더욱 그려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떠나보내는 허무와 절망과 삶의 상실감을 술로 달래는 시인의 괴로움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시인의 전후 세대의 깊은 아픔과 삶의 진실한 괴로움을 능히 뼈저리게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 머리로는 이해한다고 하지만 그 깊은 시인의 내면의 고민을 진실로 다가갈 수 없을 것이다.
오직 본인만이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는 단지 그 시인의 마음과 분위기만을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다만 이런 가을에 이 시의 노래를 다시 꺼내어 음미하면서 가수인 박인희의 낭송만이 귓가에 맴돌 뿐이다.
<목마와 숙녀 - 박인환 시 박인희 낭송>
'일상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광풍제월(光風霽月)(2024.10.19.) (20) | 2024.10.19 |
---|---|
괜찮아 - 한 강 (10) | 2024.10.12 |
시인들은 무엇하러 있는가 - 김현승 (8) | 2024.09.28 |
知者不惑, 仁者不憂, 勇者不懼(지자불혹, 인자불우, 용자불구) (0) | 2024.09.21 |
추석 명절에 평창 효석문화제에 다녀오다 (8) | 2024.09.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