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21:1~14> 속죄에 따르는 기도 응답
다윗이 기브온 사람의 말을 들어 주다
1. 다윗의 시대에 해를 거듭하여 삼 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의 집으로 말미암음이니 그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
2. 기브온 사람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요 그들은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라 이스라엘 족속들이 전에 그들에게 맹세하였거늘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그들을 죽이고자 하였더라 이에 왕이 기브온 사람을 불러 그들에게 물으니라
3. 다윗이 그들에게 묻되 내가 너희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내가 어떻게 속죄하여야 너희가 여호와의 기업을 위하여 복을 빌겠느냐 하니
4. 기브온 사람이 그에게 대답하되 사울과 그의 집과 우리 사이의 문제는 은금에 있지 아니하오며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사람을 죽이는 문제도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하니라 왕이 이르되 너희가 말하는 대로 시행하리라
5. 그들이 왕께 아뢰되 우리를 학살하였고 또 우리를 멸하여 이스라엘 영토 내에 머물지 못하게 하려고 모해한 사람의
6. 자손 일곱 사람을 우리에게 내주소서 여호와께서 택하신 사울의 고을 기브아에서 우리가 그들을 여호와 앞에서 목 매어 달겠나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내가 내주리라 하니라
7. ○그러나 다윗과 사울의 아들 요나단 사이에 서로 여호와를 두고 맹세한 것이 있으므로 왕이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아끼고
8. 왕이 이에 아야의 딸 리스바에게서 난 자 곧 사울의 두 아들 알모니와 므비보셋과 사울의 딸 메랍에게서 난 자 곧 므홀랏 사람 바르실래의 아들 아드리엘의 다섯 아들을 붙잡아
9. 그들을 기브온 사람의 손에 넘기니 기브온 사람이 그들을 산 위에서 여호와 앞에 목 매어 달매 그들 일곱 사람이 동시에 죽으니 죽은 때는 곡식 베는 첫날 곧 보리를 베기 시작하는 때더라
10. ○아야의 딸 리스바가 굵은 베를 가져다가 자기를 위하여 바위 위에 펴고 곡식 베기 시작할 때부터 하늘에서 비가 시체에 쏟아지기까지 그 시체에 낮에는 공중의 새가 앉지 못하게 하고 밤에는 들짐승이 범하지 못하게 한지라
11. 이에 아야의 딸 사울의 첩 리스바가 행한 일이 다윗에게 알려지매
12. 다윗이 가서 사울의 뼈와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를 길르앗 야베스 사람에게서 가져가니 이는 전에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을 길보아에서 죽여 블레셋 사람들이 벧산 거리에 매단 것을 그들이 가만히 가져온 것이라
13. 다윗이 그 곳에서 사울의 뼈와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를 가지고 올라오매 사람들이 그 달려 죽은 자들의 뼈를 거두어다가
14.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와 함께 베냐민 땅 셀라에서 그의 아버지 기스의 묘에 장사하되 모두 왕의 명령을 따라 행하니라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니라.
1. During the reign of David, there was a famine for three successive years; so David sought the face of the LORD. The LORD said, "It is on account of Saul and his blood-stained house; it is because he put the Gibeonites to death."
2. The king summoned the Gibeonites and spoke to them. (Now the Gibeonites were not a part of Israel but were survivors of the Amorites; the Israelites had sworn to spare them, but Saul in his zeal for Israel and Judah had tried to annihilate them.)
3. David asked the Gibeonites, "What shall I do for you? How shall I make amends so that you will bless the LORD's inheritance?"
4. The Gibeonites answered him, "We have no right to demand silver or gold from Saul or his family, nor do we have the right to put anyone in Israel to death." "What do you want me to do for you?" David asked.
5. They answered the king, "As for the man who destroyed us and plotted against us so that we have been decimated and have no place anywhere in Israel,
6. let seven of his male descendants be given to us to be killed and exposed before the LORD at Gibeah of Saul -- the Lord's chosen one." So the king said, "I will give them to you."
7. The king spared Mephibosheth son of Jonathan, the son of Saul, because of the oath before the LORD between David and Jonathan son of Saul.
8. But the king took Armoni and Mephibosheth, the two sons of Aiah's daughter Rizpah, whom she had borne to Saul, together with the five sons of Saul's daughter Merab, whom she had borne to Adriel son of Barzillai the Meholathite.
9. He handed them over to the Gibeonites, who killed and exposed them on a hill before the LORD. All seven of them fell together; they were put to death during the first days of the harvest, just as the barley harvest was beginning.
10. Rizpah daughter of Aiah took sackcloth and spread it out for herself on a rock. From the beginning of the harvest till the rain poured down from the heavens on the bodies, she did not let the birds of the air touch them by day or the wild animals by night.
11. When David was told what Aiah's daughter Rizpah, Saul's concubine, had done,
12. he went and took the bones of Saul and his son Jonathan from the citizens of Jabesh Gilead. (They had taken them secretly from the public square at Beth Shan, where the Philistines had hung them after they struck Saul down on Gilboa.)
13. David brought the bones of Saul and his son Jonathan from there, and the bones of those who had been killed and exposed were gathered up.
14. They buried the bones of Saul and his son Jonathan in the tomb of Saul's father Kish, at Zela in Benjamin, and did everything the king commanded. After that, God answered prayer in behalf of the land.
<말씀 묵상>
기브온 사람들이 원수를 갚음
1. 다윗이 다스리던 시대에 3년 동안 계속 기근이 들었습니다.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간구했더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울과 피로 얼룩진 그 집안 때문이다. 그가 기브온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이다.”
2. 왕은 기브온 사람들을 불러 말했습니다. 그 당시 기브온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자손이 아니었고 아모리 사람들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을 살려 두겠다고 맹세했지만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를 향한 열심이 지나쳐서 그들을 죽였던 것입니다.
3. 다윗이 기브온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해 주면 좋겠느냐? 내가 또 무엇으로 보상해 주면 너희가 여호와의 유업을 위해 복을 빌겠느냐?”
4. 기브온 사람들이 다윗에게 대답했습니다. “사울과 그 집안과 우리의 분쟁은 금이나 은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더구나 우리에게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죽일 권리가 없습니다.” 다윗이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너희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 주면 되겠느냐?”
5. 그들이 왕께 대답했습니다. “사울은 우리를 멸망시키고 우리를 두고 음모를 꾸며 이스라엘 영토 안에 붙어 있지 못하게 한 사람입니다.
6. 사울의 자손들 가운데 남자 일곱 명을 우리에게 넘겨주십시오. 그들을 여호와께서 선택하신 왕 사울의 고향 기브아에서 여호와 앞에서 매달아 죽이겠습니다.” 그러자 왕이 말했습니다.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 넘겨 주겠다.”
7. 왕은 사울의 손자며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은 아껴 두고 내주지 않았습니다. 다윗과 사울의 아들인 요나단이 여호와 앞에서 한 그 맹세 때문이었습니다.
8. 왕은 아야의 딸 리스바가 낳은 사울의 두 아들 알모니와 므비보셋과 사울의 딸 메랍이 므홀랏 사람 바르실래의 아들인 아드리엘에게 낳아 준 다섯 아들들을 데려다가
9. 기브온 사람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이 그들을 여호와 앞에서 산에 있는 나무에 매달자 일곱 명은 모두 함께 죽었습니다. 그들이 죽임당한 것은 첫 수확기였고 보리 추수가 시작될 무렵이었습니다.
10. 아야의 딸 리스바는 굵은 베를 가져다가 자신을 위해 바위 위에 펴고 앉아서 추수가 시작될 때부터 하늘에서 비가 쏟아져 내려 그 시체가 젖을 때까지 낮에는 공중의 새들이, 밤에는 들짐승들이 시체를 건드리지 못하게 지켰습니다.
11. 다윗이 아야의 딸이자 사울의 첩인 리스바가 하는 일을 전해 듣고
12. 그리로 가서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의 뼈를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에게서 찾아왔습니다. 사울이 길보아에서 쓰러진 뒤 블레셋 사람들이 벳산 광장에서 그들을 목매달아 두었는데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이 그 뼈들을 남몰래 가져갔던 것입니다.
13. 다윗은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의 뼈들을 가져오고 거기 목매달아 죽은 뼈들도 가져왔습니다.
14.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의 뼈들은 왕의 모든 지시에 따라 베냐민 땅 셀라에 있는 사울의 아버지 기스의 무덤에 묻히게 됐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오늘의 말씀 요약>
다윗이 기근 때문에 간구하자 하나님은 사울이 기브온 사람을 죽였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기브온 사람은 자신들을 학살한 이의 자손 7명을 내달라 하고, 다윗이 넘겨준 이들을 모두 죽입니다. 다윗이 그들의 뼈를 거둬 사울과요나단의 뼈와 함께 기스의 묘에 장사한 후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십니다.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의 뼈들은 왕의 모든 지시에 따라 베냐민 땅 셀라에 있는 사울의 아버지 기스의 무덤에 묻히게 됐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2021년 새해 특별기고]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신가?
- 크리스챤투데이 오피니언/칼럼(2021.01.06. 이상규 박사. 백석대 석좌교수, 고신대 전 교수)
하나님의 침묵 너무 길다? ‘때’에 대한 우리 개념일 뿐
궁극적으로 우리 역사를 당신의 거룩한 뜻에 이루실 것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원근법’으로 역사를 보는 안목
인식하든 못하든, 우리 날들은 오직 주님 손 안에 있다
하나님은 역사를 주관하시는가?
흔히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고 역사의 주관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을 보면, 정말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일까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다. 하나님은 정말 살아 계시고 우리가운데 역사하실까? 그 분은 지금도 인간의 역사 속에 개입하시고 간섭하실까?
그렇다면 어떻게 악이 존재하며 의로운 사람이 고통당하고, 불의와 부정의가 활개 칠 수 있을까? 어떻게 거짓과 위선이 활개치고, 참학(慘虐)과 광포(狂暴)가 줄을 잇고, 무죄한 이가 칼날에 쓰러지고, 의로운 외침이 곡절(曲折)되고, 불의한 자가 권력을 잡고 불법을 자행할 수 있는가?
이런 의문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라,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주전 12세기경에 살았던 욥은 ‘왜 의인이 고통당해야 하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 치하의 일본에서 천주교도들도 동일한 질문을 했다. 엔도 슈사쿠(遠藤周作)의 소설 ‘침묵’에는 이런 질문에 대한 작가의 고뇌가 그려져 있다.
나치 하에서 유대인들의 의문도 동일했다. 만일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왜 하나님은 이 살육의 현장에서 침묵하고 계시는가?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찾으며 절규했다. 아우슈비츠에서 기적적으로 목숨을 구한 엘리 위젤(E. Wiesel)은 그의 책 ‘밤(Night)’에서 “하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라고 물었다.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의문이 있다. 실제로 인간의 역사에는 우리가 답할 수 없는 문제가 수없이 많다. 이런 일들을 우리는 다 알 수 없지만 여기에는 하나님의 숨은 뜻이 있다고 보았고, 이 숨은 뜻을 마르틴 루터는 ‘하나님의 마스크’라고 불렀다.
성경적 조명
결국 우리는 성경에서 답을 찾을 수밖에 없다. 성경은 이런 점에 대해 분명하게 답하고 있다.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자일 뿐 아니라 역사의 주관자이며,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시고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창세기 50장 20절에서 요셉은 하나님이 인간의 삶을 주관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고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다. “당신은(사람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
요셉은 형들에 의해 이집트로 팔려가 갖은 고난을 겪었으나, 하나님은 그를 통해 자기 백성을 구원하셨다. 야곱의 식구들이 양식을 구하기 위해 이집트에 내려갔을 때가 흉년이 시작된 지 2년째였다. 흉년은 5년 더 계속될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요셉을 이집트에 미리 보내지 않으셨다면 야곱의 식구들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 속에 개입하시고 인간의 악행을 통해서도 자기 백성을 보존하신 것이다. 그래서 요셉은 나를 이곳으로 보낸이는 당신들이 아니라 하나님이라(창 45:8)고 고백한다. 단지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을 따름이다.
하나님은 초월적 존재이지만 역사 저편에서 팔짱 끼고 계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 한복판에서 역사를 주관하시고 통치하신다는 점을 보여 주고 있다. 초월해 계시면서도 내재하시는 하나님, 내재하시지만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영국의 이신론(Deism)은 하나님의 창조는 인정하되, 하나님의 역사 간섭은 부인했다. 이들은, 피조된 세계는 자연법칙에 따라 움직일 따름이고 신은 인간 역사에 개입하거나 간섭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하나님의 역사 간섭을 부인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은 창조자일 뿐 아니라 창조하신 세계를 다스리시고 인간 역사의 통치자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역사에 개입하시고 간섭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성경의 가르침은 수없이 많다.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이시고(대하 36:22, 스 1:1) 포로된 자기 백성을 귀환하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셨다. 그래서 역대하 36장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께서 바사의 고레스 왕의 마음을 감동시키셨다(God moved the heart of Cyrus king of Persia).”
작은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수중에 있다(마 10:29)고 말한다. 비록 볼테르는 “역사는 인간의 그림자”라고 하여 하나님의 역사 간섭을 배제하고 인간이 역사의 주체인 것처럼 말했으나, 하나님이 역사의 주체이며 역사의 주관자라는 점을 말하고 있다. 그 동일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계신다.
헬라인과 히브리인들의 역사 이해
고대 그리스인들은 역사를 끝도 시작도 없는 무한한 반복으로 보았고, 그 역사 과정은 맹목적인 순환으로 보았다.
농경 문화권 속에서 계절의 순환을 보고 살았던 그리스인들은 역사를 맹목적인 순환의 과정으로 이해했다. 저들은 자연의 순환에서 역사의 순환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영원회기론(永遠回歸論)이 나왔다. 인간과 자연 만이 아니라 신들도 예외일 수 없었다. 신들도 역사의 순환 속에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리스 철학의 밑바닥에는 운명론 혹은 숙명론이 자리하고 있다.
이를 그리스인들은 모이라(Moira, μοῖρα)라고 불렀다. 그리스인들은 역사 외적인 요인을 보지 못했기에, 불트만(Rudolf Bultmann)은 “그리스인들은 역사를 본 것이 아니라 자연을 보았다”고 말한 바 있다.
희랍(헬라)인들은 역사를 맹목적인 순환의 과정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역사에서 새로운 것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고 보았고, 따라서 역사에서의 진보나 발전의 개념(the idea of progress)도 없었고 역사가 지향하는 목표도 없었다. 역사는 무한한 반복일 뿐이었다.
달팽이 장애물 극복 용기 강한 노력 동물 자연 다리
그러나 히브리인들은 희랍적인 회기론을 극복했다. 이들은 희랍인들과 달리 역사의 분명한 시작과 하나님의 역사 간섭, 그리고 역사의 분명한 목표를 상정했다.
즉 역사란 하나님의 창조와 더불어 시작되었고, 역사 과정은 하나님께서 개입과 간섭, 그리고 역사란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전개되는 과정으로 이해했다.
역사는 하나님이 정하신 목표를 향한 과정이었다. 그 역사는 모든 인류를 포용하는 일원론적(一元論的)인 것이었다. 히브리인들은 역사의 무한한 회귀만을 믿었던 운명론적 역사이해와 달리, 역사는 목표를 향한 선적(線的)인 과정, 곧 직선적 역사관(liner view)을 가지게 되었다.
자연은 신비로운 자존실체(自存實體)가 아니라는 인식에서 히브리인들은 자연중심사상을 탈피할 수 있었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았기에 자연을 비신격화(dedeify) 할 수 있었다.
자연은 신비로운 정령(精靈)이 아니라, 하나님이 무에서(ex nihilo) 창조하신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었고,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하게 된 것이다.
정리하면, 역사는 하나님의 창조로부터 시작됐고, 그 역사과정은 의미 없는 반복이 아니라 유의미한 진보이며, 역사는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는 목적 있는 과정이라고 본 것이다. 이것이 히브리적 역사이해였다. 히브리적 역사관을 계승한 것이 기독교 역사이해이다.
기독교적 역사이해
기독교의 역사이해는 근본적으로 다음 3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역사는 하나님의 창조, 인간의 타락,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계획이 펼쳐지는 과정이라는 점이다. 이와 같은 역사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을 구원사관(救援史觀) 혹은 구속사관(救贖史觀)이라고 말한다.
둘째, 모든 역사 과정은 맹목적이거나 자연이나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개입하시고 간섭하시고 섭리하신다는 점이다. 이를 섭리사관(攝理史觀)이라고 말한다.
셋째, 역사는 분명한 시작과 함께 분명한 목표 곧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한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사관을 목적론적 사관(目的論的 史觀)이라고 말한다.
역사는 맹목적인 반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과정이며, 역사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정하신 목표를 행해 나아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다.
비관주의적인 낙관주의자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per verbum) 무에서(ex nihilo)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피조된 세계를 유지하시며(conservatio) 다스리신다(gubernatio). 그래서 역사는 분명한 시작과 함께 하나님이 설정하신 분명한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지구 궤도를 돌고 있는 수많은 별들과 자연계의 미미한 현상들, 그리고 복잡한 인간의 삶이 다 그의 다스림 아래 있다.
그렇다면 왜 우리 사회에는 악이 활개치며, 공의가 무너지고 의로운 자가 핍박당하는가? 따지고 보면 우리의 모든 문제는 범죄한 인간의 악함 때문이다. 인간의 죄와 죄된 욕망, 욕심 탐욕, 권력에의 야망, 곧 악함이 자연을 파괴하고 거짓과 불의를 행하고 인간 생명을 살상하고 있다.
오늘 우리 현실을 보면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때로 앞이 보이지 않는 긴 턴널을 지나는 것 같아 절망하기도 한다. 이럴 때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역사를 주관하는가 묻기도 한다.
이런 우리의 인식을 마르틴 부버(Martin Buber)는 ‘하나님의 일식(日蝕) 현상’이라 불렀다. 하나님이 역사를 다스리시고 통치하시지만, 마치 달이 해를 가려 해가 보이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에게는 역사를 긴 안목으로 헤아리는 안목이 없다. 눈앞의 현실만 인식할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를 통시적으로 파악하지 못한다. 우리의 단견(單眼)으로는 하나님의 침묵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역사를 긴 안목으로 굽어보는 장견(長見)이다. 지금은 이해할 수 없으나 먼 훗날 하나님의 인내와 침묵, 인간의 악행을 허용하신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쉬 낙담하고 절망하기도 한다. 우리의 시각으로 볼 때, 우리의 현실은 절망적이고 비관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낙관할 수 있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비관론적 낙관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불의와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침묵이 너무 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때’에 대한 우리의 개념일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이해할 수 없다. 지금 우리는 헤아리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역사를 당신의 거룩한 뜻 안에서 이루어 가실 것이다. 우리에게 역사를 원근법(perspectively)으로 보는 안목이 필요할 뿐이다.
우리가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우리의 날들은 오직 주의 손 안에 있다. 그러했기에 시편 기자는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나이다(My times are in thy hand)”라고 고백했을 것이다.
다윗이 왕으로 있을 때에 삼 년이나 내리 흉년이 든 적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여호와 앞에 나아가서 그 곡절을 물으니,
여호와께서는 사울과 그의 집안이 기브온 사람을 죽여
살인죄를 범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다윗이 기브온 사람을 불러 물어보았습니다.
기브온 사람은 본래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아모리 사람 가운데서 살아남은 자들이며,
전에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을 살려 주겠다고 맹세한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을 향한 사랑이 지나쳐서,
그들을 전멸시키려고 했던 것입니다.
다윗이 기브온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해 주면 좋겠느냐?
내가 어떻게 속죄하여야 너희가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용서하고,
여호와의 기업인 이 백성을 위하여 복을 빌어 주겠느냐?”
기브온 사람들이 다윗에게 대답했습니다.
“사울이나 그의 집안과 우리 사이의 갈등은 금이나 은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니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을 죽일 권리가 우리에게는 있지 아니하나이다.”
다윗이 물었습니다. “그러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무엇을 하면 좋겠느냐?
너희가 말하는 대로 내가 시행하리라.”
그들이 왕께 아뢰었습니다. “우리를 학살하였고 또 우리를 멸하여
이스라엘의 영토 안에 단 한 사람도 발도 붙이지 못 하게 한 사람의
자손 일곱 사람을 우리에게 내어주소서. 그들을 여호와께서 택하신 왕
사울의 고향인 기브아에서 여호와 앞에서 목매어 달겠나이다.”
그러자 왕이 말했습니다.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 내어주리라.”
그러나 다윗은 사울의 아들인 요나단과 여호와 앞에서 맹세한 일이 있으므로,
사울의 손자이며 요나단의 아들은 므비보셋은 아껴 두고 내주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이 왕은 아야의 딸이며 리스바가 낳은 사울의 두 아들 알모니와 므비보셋을 붙잡고,
또 사울의 딸 메랍이 낳은 므홀랏 사람 바르실래의 아들인
아드리엘과의 사이에서 낳은 다섯 아들을 붙잡아
기브온 사람에 넘겨주었습니다.
기브온 사람이 산 위에 올라가 여호와 앞에서 그들을 목매어 달자,
그들 일곱 명이 모두 함께 죽었습니다.
그들이 죽은 때는 곡식 베는 첫날 곧 보리를 베기 시작하는 때였습니다.
두 아들 알모니와 므비보셋(8절)에서 여기의 므비보셋은 리스바의 아들로,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과는 동명이인으로 다른 사람입니다.
또한 메랍이 낳은 므홀랏 사람 바르실래(8절)에서 다윗이 마하나임 성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 다윗이 요단강을 건너도록 도와준 80세의 노인 바르실래는 길르앗 사람이고(삼하 19:31~), 여기의 바르실래는 므홀랏 사람으로 사울의 딸 메랍의 시아버지입니다(역시 동명이인).
그때에 아야의 딸 리스바가 굵은 베를 가져다가 자기를 위하여 바위에 펴고 앉아서
보리를 거두기 시작할 때부터 하늘에서 그 시체에 비가 쏟아져 내릴 때까지
낮에는 공중의 새가 앉지 못하게 하고, 밤에는 들짐승들이 가까이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아야의 딸이며 사울의 첩인 리스바가 이렇게 하였다는 소식을 다윗이 전해 듣고
다윗이 길르앗 야베스로 가서 그곳 사람들에게서
사울의 뼈와 그 아들 요나단의 뼈를 찾아왔습니다.
이는 전에 사울이 길보아에서 죽었을 때에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의 시체를
벧산 거리에 매달아 두었던 것을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몰래 가져온 것입니다.
다윗이 이렇게 사울의 뼈와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를 가지고 올라오니,
사람들이 나무에 목매달아 죽은 자들의 뼈들도 가져와서는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와 함께
베냐민 땅 셀라에 있는 사울의 아버지 기스의 묘에 함께 묻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왕의 명령을 따라 행한 일입니다.
그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보리 거두기 시작할 때부터 비가 내릴 때까지(10절)에서 보리는 4월에 추수하고 비가 오는
우기는 10월이므로, 리스바는 적어도 5개월을 그렇게 밖에서 지내며 아들의 시체를
지킨 것입니다.
지금은 기도하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무언가에 쫓기면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기도란 바쁜 일상 중에서, 고난 중에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질문하는 행위이다.
분명 기도가 없는 신앙은 자신의 중심적인 삶을 살아가므로 자기 편견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에게 해결되지 않은 죄가 있다면 주님 앞에 꺼내 놓고 해결을 받아야 하리라.
우리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고 해서 회개하지 않은 과거의 허물들이 사라진 것으로 오해하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회개하기를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시기 때문이다.
기억나지 않는 죄에 대해서는 성령님께서 생각나게 해 주실 것이라 믿으며, 우리는 언제나 스스로 겸비하고 우리에 대해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께 깨끗한 모습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회개의 자리로 나오는 자들에 대해 언제나 두 팔을 벌려 환영해 주시기 때문이다.
인생의 영원한 소망이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 가정을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긍휼하심으로 늘 평강으로 인도해 주시고, 믿음의 유산을 물려주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가정을 이루게 하시며, 두 아들의 장래가 주님의 믿음 안에서 소망과 꿈을 키워가도록 하나님의 넘치는 지혜와 도우심으로 이끌어 주시고, 하나님의 영광과 살아계심의 역사가 삶의 현장에서 온전히 드러나게 하소서.
특별히 큰 아들을 향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직장에서 자신의 꿈과 비전을 마음껏 펼치며 겸손히 섬겨가며 실력을 키워가도록 늘 함께해 주시고, 작은 아들의 직장에서 능력과 인품을 인정 받을 수 있도록 건강과 지혜로 함께 하시고, 두 아들의 장래의 배우자를 믿음 안에서 예비해주시고, 우리집 장막을 더욱 넓혀주는 축복이 임하여 주시며, 우리 가정이 구원과 축복과 은혜와 회복의 통로가 되게 하소서.
우리의 기도가 더욱 깊어지고 하나님의 비전과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가정을 통해 날마다 이루어가게 하시며, 자신의 소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보다 앞서가지 않게 하소서.
창립50주년을 맞는 우리교회가 말씀과 기도로 날마다 거듭나게 하셔서 성령 충만한 하나님의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어가게 하시며, 건축위원회 조직과 운영이 하나님의 지혜로 믿음과 마음을 모으게 하시며, 새로운 항존직선거를 통해 하나님의 예비하신 신실한 일꾼을 선정하게 하소서.
키르키예와 시리아의 지진과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능히 이겨내도록 이 나라를 위로하시며 속히 회복하도록 구원과 도움이 손길이 임하여 주옵소서.
또한 우리 대한민국이 참으로 자신의 욕심과 이념으로 갈라진 마음을 하나님의 정의와 진리로 통합하며, 공의와 진실로 다스려지는 이 나라가 되도록 하나님께서 친히 주장하시며, 다음세대가 꿈과 비전을 이루어가도록 교육하게 하시고, 모든 백성들이 행복한 가정을 이루게 하소서.
화장실 누수와 함께 가정이 온전히 회복되도록 모든 여건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게 하시고, 한 주간도 가정이 믿음과 사랑으로 회복되고 날마다 서로 소통하고 행복한 날들을 보내게 하소서. 아멘.
내 영혼아 내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시 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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